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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의 맛과 멋]①PJ의 여의도 입성기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기사 작성일 2019-05-07 08:55:06 최종 수정일 2019-05-07 09: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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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의 맛과 멋] 박정.jpg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국회뉴스ON 인터뷰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시작한 탁구…대학에서는 유전공학자 꿈꿔

    유학비 마련하려 영어강사 아르바이트 하다가 '스타강사' 유명세

    사회에서 받은 혜택,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정치권 입문


    수강 연인원 100만명. 미국 하버드와 MIT 등 유학생 10만명 배출. 박정(56·경기 파주시 을·초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신의 이름을 딴 '박정어학원'을 운영하던 시절 세운 기록이다. 유학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아르바이트로 하려 했던 영어강사 일은 '스타강사'로 이름을 알리면서 그의 업(業)이자 그를 상징하는 평생 수식어가 됐다. "지금도 기자분들이나 대기업·중견기업 간부들한테 '저 박정어학원 나왔어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중·고교 때는 탁구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시작했지만 지역예선에서 개인전·단체전 우승을 할 만큼 실력이 좋았다. 운동을 그만둔 이후 공부로 서울대학교(농생물학과)에 진학해 유전공학자를 꿈꿨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인재영입 케이스로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뎠고, 제20대 국회에 입성한 후에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평화를 최우선 가치로 두고 의정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이름(박정)과 지역구(파주)의 약자이자 평화(Peace)와 정의(Justice)를 상징하는 'PJ'. PJ의 여의도 입성기를 국회뉴스ON이 들어봤다.

     

    중학교 2학년 파주군 탁구대회
    중학교 2학년 때 파주군 탁구대회 우승 후 찍은 사진. 박정(아랫줄 왼쪽 두 번째) 의원과 동료 선수들, 감독, 코치.(사진=의원실 제공)

     

    ◆중·고교 시절 장학금 위해 야간학교·체육특기자로 진학

     

    "미안하다(아들아). 지금 집안 상황이 어렵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제가 1년 돈 벌어서 중학교 갈게요"라고 선뜻 대답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기울면서 등록금을 내기 어려워졌다.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야간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집안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고교 진학을 위해 중학교 2학년 때 탁구라켓을 들었다. 체육특기자로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장학금 주는 곳으로 가야하는데 탁구를 통해서 체육특기자를 해야 고등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 (탁구부가) 창단되는 팀에 가게 된 거예요. 경기(도)하고 인천(광역시)이 분리되기 전에 인천으로 가서 저랑 친구랑 창단팀 만들어서 시작을 했죠."

     

    고교시절 한창 탁구선수로 이름을 알렸지만 돌연 운동을 그만뒀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운동을 한 건 공부를 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탁구로 꼭 밥먹고 살려는 게 아니었고 공부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목적이 되면 안되겠다 싶어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체육선생님이 감독이었는데 '왜 니 마음대로 관두냐. 50대 맞고 관둘래' 하시더라고요. 저는 50대 맞고 버텼고 같이 간 친구는 자퇴해버렸어요. 이상하게 체력이 있어서 그런지 첫 시험에 3등을 하니까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너 왜 컨닝하고 그러냐'고 또 때리시는 거예요. '한 번 보시라. 내 주변에 다 육상부 애들인데 누구 꺼를 보고 썼겠느냐. 공부 열심히 했다' 그랬죠."

    박 의원은 고교 동기들 중 유일하게 서울대에 합격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매일 실험실과 탁구 동아리실을 왔다갔다하며 공부와 운동에 전념했다. 당시 첨단산업으로 각광받던 유전공학을 계속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준비했다. 가정형편이 쉽게 나아지지 않아 돈을 아끼려 독서실에서 홑이불을 덮고 자는 날도 많았다. "대학교 들어와서 서클(동아리)은 탁구부를 했어요. 금단현상이 있는지 탁구를 끊지 못했죠. 그때 유전공학이 막 한창 뜰 때였거든요. 그래서 공부하다가 유학을 가야하는데, 대학원 마치고 유학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때도 좀 어려웠으니까. 기숙사에 못 들어가면 돈이 없어서 독서실 같은 데서 자기도 했죠."

     

    서울대학교 농생
    서울대를 다니며 탁구 동아리를 하던 시절.(사진=의원실 제공)

     

    95년
    1995년 박정어학원 CEO 시절 영어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사진=의원실 제공)

     

    ◆아르바이트 보조강사에서 CEO로…"비결은 도제시스템"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영어강사 아르바이트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꿨다. 메인강사를 돕는 보조강사 자리였는데 오히려 그가 더 주목받았다. 강남의 여러 어학원에서 하루에 10~12시간 수업을 하고 상담과 관리까지 직접 했다. 수업은 모두 조기 마감됐고 강의실은 학생들로 넘쳤다. "학원 나가서 아르바이트 보조강사 하다가 유명해졌죠. 메인강사가 잘 가르치시는데 이 분이 너무 미국식이니까 한국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해서…. 토플(미국대학 진학시험), GRE(미국대학원 진학시험)를 가르쳤는데 시험 잘 봐야 좋은 대학 가잖아요. 어쨌든 간에 실력은 두 번째 문제고 시험을 잘 봐야 하기 때문에 시험 잘 보는 요령을 가르쳐줬어요."

     

    6년여 동안 영어강사를 하다 직접 어학원을 차린 건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종의 도제시스템을 도입해 단순한 영어강사가 아닌 영어교육 '장인'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한 강사가 모든 분야를 가르치는 기존 어학원과는 달리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를 각각의 강사가 가르치는 분업화와 전문화를 시도했다. 학생들이 공부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사물함과 도서관, 휴게실, 자료공부방을 만드는 등 '고객중심경영'을 도입했다. 학원 규모는 점점 커져 압구정동 이곳저곳에 캠퍼스 타운을 형성했고 'EDi 박정어학원' 체인이 전국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저희 강사들이 학벌이 뛰어나고 그렇진 않아도 다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만큼 열정을 가지고 시스템화 되어서 자기가 최선을 다하는 그런 거였거든요. 강사들에게도 전 수업을 다 듣게 해서 강의평가를 쓰게 하고, 어떻게 더 발전시킬 것인지 계획서를 쓰게 했죠. 강사들한테 '우리가 수강료 받는데 공부 많이 시켜서 성적 올리게 하는 건 직무유기다' 제가 그렇게 얘기했어요. 공교육도 아니고 사교육을 받는데 강사들이 더 공부를 많이 해서 학생들이 성적 받기 쉽게 해줘야지, 공부 열심히 해서 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랬죠."

     

    박정 의원이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한 국회뉴스ON과의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으며 답변하고 있다.(사진=유윤기 촬영관)
    박정 의원이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한 국회뉴스ON과의 인터뷰에서 기자의 질문에 손짓을 하며 답변하고 있다.(사진=유윤기 촬영관)

     

    ◆제17대 총선 앞두고 정치권 영입…"P·J 두 가지를 이루겠습니다"

     

    성공한 대표이사(CEO)의 길을 걷다가 정치권에 뛰어든 이유를 묻자 "부모님이 거는 기대도 있었고, 제가 학교 다니려면 스스로 뭘 해결해야 하니까 (민주화운동 할 때) 같이 돌을 못 던지고 해서 늘 미안했고 부채의식이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2014년) 당시 열린우리당 창당이 됐어요. 열린우리당에서 정동영 의장이 인재영입 단장을 하실 때예요. 나름대로 젊은이들한테 인기있는 안철수, 박정 이런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죠. 안철수 대표도 그때 제안을 받았지만 안 하신 거고, 저는 뭣도 모르고 '빚 갚아야겠다' 싶어서 했죠. 국민들이 민주화를 다 만들어냈는데 나는 빠졌구나, 이런 거 때문에 인재영입 제안이 왔을 때 바로 들어와서 (도전)했어요."

     

    그는 2004년 제17대 총선에 이어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도 고향인 파주에서 아깝게 낙선했다. 북한과 맞닿아 있는 접경지역은 비(非) 보수정당 후보에게는 험지(險地)였다. 첫 고배를 마신 그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머리도 식히고 중국 우한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며 사업을 했다. "우리나라 EBS 같은 CETV가 있는데 거기에 한국어 교육방송을 집어넣었어요. 1년간 하면서 전국방송을 하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재방송도 하고 그러면서 성과는 있었거든요. 국영방송에서 그걸 했으니까 '한국어가 표준어구나. 북한말이 아니고' 이런 인식을 갖게 했죠. 한류를 살리는 데도 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세대들이 한국에 친근감을 갖게 만화로 제작했으니까요."

     

    제20대 국회에서 세 번째 도전 끝에 당선된 박 의원은 '피스 앤 저스티스(Peace and Justice)'를 사명으로 꼽았다. "정치를 하면서 뭘 해야 하나 생각해보니까 제 이니셜하고 관계가 있는데 'PJ'잖아요. 파주도 PJ고 제 이름도 PJ여서 두 가지를 해야겠다 했죠. 지역적으로나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평화(Peace)를 목표로 하고 또 하나는 사회정의(Justice)를 위해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죠. 그래서 늘 평화와 정의를 목표로 하는 의정생활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박정 의원과의 인터뷰 ②편 계속 됩니다.
     

     '바르고 공정한 국회소식'

    국회뉴스ON 이상미 기자 smsan@assembl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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