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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의 맛과 멋]①공감능력 '만렙' 언론개혁 전도사…이제는 경제적 약자 대변인으로

    기사 작성일 2019-01-14 08:44:13 최종 수정일 2019-01-14 08: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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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혜선 정의당 의원 국회뉴스ON 인터뷰
    유년시절 5·18 광주민주화운동 겪으며 사회화…사회의식 높은 저항적 작가 꿈꿔
    KBS·SBS 노조운동 하다가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20여년간 언론문제에 천착
    심상정 대표 러브콜로 정의당 언론개혁단장 맡아…제20대 비례대표로 국회 입성

     

    "가지고 있는 '공감능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 장점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건데 정치공간에 오니까 주변에서 장점이라고 이야기하고, 정치적 성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발견한 거죠. 그냥 나는 '내가 인복이 많다'고 표현하고 그랬거든요." 어려서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사춘기 시절에는 비밀노트에 깨알같이 자필 시를 적어 보물처럼 간직했다.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어릴 적 간접체험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행복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사회에 나와서는 순혈주의가 강한 방송사(광주KBS·SBS)에서 외부 출신 노조집행부 역할을 하는 등 노조활동·언론운동에 젊은 시절을 바쳤다. 글을 쓰거나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때 가장 도움이 된 건 그의 '공감능력'이었다. 제20대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하면서는 영세 자영업자·소상공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


    추혜선(48·비례대표·초선) 정의당 의원은 시민사회(언론개혁시민연대)에서 잔뼈가 굵은 언론개혁운동가 출신이다. 그는 방송의 독립성 확보 등 언론개혁 의제뿐 아니라 방송통신결합과 같은 언론정책에도 시야가 밝다. 20여년간 쌓은 방송 현장과 시민사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진보정당에서 활발히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국회뉴스ON과의 인터뷰에서 "진보정당과 시민사회의 협업, 그리고 가교 역할을 좀 하겠다고 (정치권에)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제20대 국회 전반기에 KBS·MBC 등 공영방송의 정상화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면, 후반기 국회에서는 생계현장에서 날마다 생사와 싸우고 있는 이들을 위해 분초를 다투고 있다. 그만의 뛰어난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어려운 이들을 대변하고 있는 추혜선 의원을 국회뉴스ON이 만나봤다.

     

    고등학교 시절 시를 낭송하는 문학소녀 추혜선의 모습
    고교시절 시를 낭송하는 '문학소녀 추혜선'의 모습.(사진=의원실 제공)

     

    ◆유년시절 키운 작가의 꿈…"독립군 같은 작가가 돼야겠다 생각했죠"


    "왜 우리가 '구김살 없이 자랐다, 밝게 자랐다'고 하잖아요. 그렇지 못했어요. 밝게 자라지 못했죠. 내 삶을 불행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유년시절 이야기를 묻자 이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전남 완도의 작은 섬마을. 미역·김 농사를 짓는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어머니는 낚시꾼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푼돈을 받는 소일거리를 했다. 어릴 적 꿈은 대도시인 '광주'로 유학을 가는 거였다. "그 작은 마을에서 뭔가 꿈을 꿀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나는 가고 싶은데 다들 (형편이)어려우니까 못 보내는 거죠. 유학을 가서 친척이 없으면 집도 구해줘야 하고 하숙도 해야 하는데 시골살림이 넉넉지 않으니까. 부모님을 이해하면서도 그런 불만이 있었죠, 원망도 있었고. '난 왜 여기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런…."


    어릴 적 추 의원은 글 쓰는 걸 좋아했다. 광주일보에서 주관하는 호남예술제에서 '시' 부문으로 입상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간사 일을 하면서 월간지 '신동아'에 시를 실으며 정식으로 등단했다. 그에게 기억에 남는 시가 있는지 물었다. "호남예술제에서 상을 탔을 때 '개나리'라는 시를 썼어요. 시골에서 학교 가는 길에 장터 옆에 개나리가 굉장히 많이 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까 노란색 물결처럼 피어있더라고요. 그걸 '올망졸망한 아이들 얼굴 같다'며 희망을 손짓하는 표현으로 했죠. 그때는 신문에 당선작 발표가 나요. 시골이라 신문이 하루 늦게 오는데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자전거 타고 언제 오나' 계속 기다리고 그랬죠."

     

    추 의원은 유년시절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고 했다.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전남 끝자락의 작은 시골마을에 살던 10살 어린 소녀에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이었고, 그 기억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했다. "그때는 광주를 벗어나 호남 지역 일대가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었죠. (광주에)계엄군이 들어오고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보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외신만 보도가 됐던 시기니까. 그때 그때 기억의 조각들이 지금 진상규명된 사실들과 같이 조각모음이 되면서 제 기억에 새겨져 있습니다."


    추 의원은 유년시절 이른바 '불온서적'을 쉽게 접했다. 동네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던 사촌오빠 방은 늘 달려갔던 비밀창고였다. 그곳에 쌓여있던 불온서적들을 읽으며 저항의 정서를 담아내는 작가가 되는 걸 꿈꿨다. "그 방에 가면 늘 오래된 종이 종이냄새가 너무 향기로웠어요. 고은 시인도 거기서 보게 되고, 저항시인들 그리고 작가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도시로 나가면 꼭 이런 사람들처럼 독립군 같은 작가가 돼야겠다' 그런 꿈을 꿨죠. 우리가 세월호 때 '집단적 트라우마'를 얘기했잖아요. 이 피비린내 나는 광주항쟁이 그 트라우마예요. 살인에 대한 끔찍함이 너무 어린시절에 각인돼버린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너무 불행한 유년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SBS노동조합에서 활동 당시 노보 편집자 교육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함께
    추혜선(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의원이 SBS노동조합에서 활동할 당시 노보 편집자 교육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의원실 제공)
    SBS 노조 활동 당시 노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추혜선 의원.(
    SBS 노조활동 당시 노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사진=의원실 제공)

     

    ◆광주KBS·SBS에서 노조활동…"내부 감시견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추 의원은 광주KBS 간사 일을 시작하면서 언론노조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가 권영길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위원장 시절이었거든요. 그때 진보정당이 첫발을 내딛고 결합하게 되면서 선거를 하러 광주로 가게 됐어요. 그러면서 광주 지역에서 사회단체 활동을 하게 된 거죠. 광주 지역에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연구회'라고 노조활동을 하시던 분들이 하나의 연구모임을 꾸려 활동했는데, 그때 광주KBS 노조에 결합해 활동하셨던 분이 지부장에 당선되면서 '같이 일하자'고 해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노조 간사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묻자 덤덤한 말투로 "감시견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답했다. "노동조합법상 조합원의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게 돼 있어요. 그 목적에 맞게 열심히 활동하는 거죠. 노동조합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아야 하잖아요. 노동조합이 내세운 명분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하고, 그래야 조합원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는 거니까. 주로 노조신문을 만들었죠. 그게 사측을 압박하고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엄청난 무기거든요. 모든 권력은 언론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선한 권력은 없습니다. 감시견 역할을 충실히 하고, 그런 활동을 조합원들과 함께 열심히 했죠. 언론사에 노동조합은 꼭 있어야 합니다. 내부 자정도 해야 하고요."

     

    아이들 운동회에 참석해서 두 딸과 함께
    두 딸과 함께 운동회에 참석한 모습.(사진=의원실 제공)


    추 의원은 MBC 노조위원장을 지낸 최문순(현 강원도지사) 언론노련 위원장의 요청으로 SBS 노동조합에 몸담았다. 1998년 SBS 노조가 갓 출범했는데 SBS 자회사인 아트텍과 뉴스텍 분사 과정에서 노조가 한 달 만에 와해가 됐다. "당시 윤세영 회장님이 '저 아가씨만 없으면 노조도 없애버릴 거 같은데' 하는 말씀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아주 많이 괴롭혀드렸죠. (SBS 노조에)들어가니까 노조설립신고서를 찾을 수 없고, 잡동사니 쌓인 데서 찾아 액자에 끼워 걸어놓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분사된 후에 SBS 직원들만 1300명 정도됐던 거 같은데 각 방을 돌면서 직접 설득하고 노조 가입원서를 받았죠." SBS 노조 간사로 들어갔을 당시 100여명에 불과하던 조합원은 7년여 후 그가 대외협력국장을 거쳐 SBS를 나올 때쯤에는 800명이 넘었다고 했다.


    노조활동에 매진하던 추 의원의 건강은 급성신부전 판정을 받을 정도로 급격히 악화됐다. "정말 일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SBS가 지상파 첫 민영방송이었고, 민영방송이 사회적 공기(公機)로 국민의 신뢰를 받느냐가 방송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했죠. 너무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기 때문에 그때 한창 두 아이를 키우면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본 적이 별로 없었어요. 아침에 못 일어날까봐. 항상 소파에 앉아 몇 년을 보내니까 몸이 말을 듣지 않길 시작하고 그래서 몸이 많이 망가졌어요. 건강 때문에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됐고 오랫동안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죠."

     

    
의원이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한 국회뉴스ON과의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사진=유윤기 촬영관)
    추혜선 의원이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한 국회뉴스ON과의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사진=김지범 촬영관)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정의당으로

     

    추 의원은 건강을 되찾은 후 언론운동을 위한 시민사회단체인 '언론개혁시민연대'에서 언론정책을 맡았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인 '방송통신융합위원회 설치' 이행을 위한 법률안을 만드는 기초작업을 하는 데 앞장섰다. 각 언론사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끝장토론을 하고, 지난한 논의를 거치는 과정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때 방송통신융합 논의가 치열하게 벌어졌어요. 기술융합이 곳곳에서 나타나잖아요. 단순한 기술융합이 아니라 각 언론사들이 굉장히 민감해 하는 이슈입니다. 언론사의 지속가능성과 생존이 결부된 사안이었기 때문이에요. 하나의 설치법을 만들어 여당 당론으로 이끌어내고, 법을 통과시키는 지난한 과정의 실무총책을 맡았죠."


    추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2015년 당시 정의당 대표였던 심상정 의원의 '러브콜' 때문이었다. 정의당의 언론 총괄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시민단체 활동과 정당 활동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며 오랫동안 민주당과 파트너로 일했지만 정의당을 택한 것은 '진보정당이어야만 한다'는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는 "민주당이 갖는 진보적인 색채가 점점 바래지고 있다"며 말을 이었다. "심 대표가 정의당 3기 대표를 맡고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정의당에 결합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의 협업 그리고 가교 역할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저는 언론개혁단장을 맡고, 김종대 선배는 국방개혁단장을 맡아 짧았지만 참 재밌게 일을 했습니다."

     

    추혜선 의원과의 인터뷰 ②편 계속 됩니다.

     

     '바르고 공정한 국회소식'

    국회뉴스ON 이상미 기자 smsan@assembl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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